탐정 장르와 RPG

RPG/생각, 느낌 2012. 11. 22. 21:00 Posted by nefos

RPG로는 탐정 장르, 추리물이라는 부분을 즐기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누가 물어보면 대부분 뜯어말리는데, 탐정 장르를 경험해보고 생각대로 흘러간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이겠지요. 탐정 장르란 무엇이고, 이것이 RPG와 적합하지 않은 부분을 알아보고, 어떻게 즐기는게 좋을지 알아봅니다.



1. 탐정 장르, 추리물이란?

제일 유명한 작품이라면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겠고, 아가사 크리스티처럼 서양에서 시작한 소설장르입니다. 영화에서 미스테리, 서스펜스 장르에 해당합니다. 일본에서 건너온 김전일, 코난, QED과 같은 만화책이 친숙하겠지요.

주인공인 탐정은 사건(주로 살인사건)에 휘말립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위해 놀라운 단서 찾기 능력과 추리력을 통해 진범을 밝혀냅니다. 그 과정에서 인물은 모험, 수사, 난관타파 등을 경험합니다. 스릴, 유머, 인물간 머리싸움 등을 주요 흥미로 삼습니다. 가장 중요한 흥미는 독자가 주인공이 갖는 단서를 가지고 추리를 하느냐는 퀴즈를 푸는데의 즐거움과 작가와 탐정의 기발함에 놀라는 즐거움입니다.



2. 탐정 장르의 기본

도입(사건의 조짐) - 전개(살인사건) - 위기(수사) - 절정(추리쇼) - 결말(뒷이야기)


연쇄살인은 [잘못된 추리-살인사건-수사]를 반복으로 하며, 추리에 혼선을 주면서 동시에 범인의 단서/함정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야하며, 동시에 탐정과 주변인물도 위험할 수 있다는 부분의 흥미를 끌어냅니다. 대부분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범인의 함정에 빠져 추리장면에서 잘못된 추리를 하는 조역(형사, 경찰, 친구)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건 발생 후 현대 한국과 같이 치안이 좋은 국가라면 신고를 해서 공권력이 처리하는게 정상이므로, 현대에는 공간제한을 통해 주인공이 추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많이 만들거나 공권력이 범인지목을 못하니까 추리력을 빌려주는 형태가 주를 이룹니다.


이러한 사건에서 범인을 확정짓는데는 다음 요소가 필요합니다.

A. 알리바이 해체(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 트릭 풀이)

B. 물증 (무엇으로, 남긴 흔적 - 흉기나 증거 찾기)

C. 동기 (왜 - 조짐)


주인공은 명석하므로 단서를 보고 설명없이 비약적인 추리를 완료지은뒤에 추리쇼에서 단서를 해석해주는 편입니다.




3. 탐정 장르의 흥미 요소

탐정 장르에서 흥미를 주는 주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것들은 혼재되어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지만, 가끔 특화된 작품들도 존재합니다.


A. 알리바이 트릭이 있고, 트릭을 독자가 풀이하는데 초점을 둔다. 결말을 알고 다시보면 단서가 눈에 띄어야한다. 독자의 추리가 틀리더라도 그걸 만회할만한 참신한 트릭이 필요하다.


B. 모험이 있으며 독자가 대리체험을 통한 스릴을 즐기는데 초점을 둔다. 주인공이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아슬아슬한 장면과 문제를 해결하는 기지를 발휘하는게 중요하다.


C. 드라마가 있어 인물간의 갈등과 해소에 초점을 맞춘다. 범인이 누구인지 맞추는 행위는 별로 중요하지않고, 사건과 진실에 따라 바뀌는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다룬다. 범행의 이유가 중요하다.



4. RPG에서 트릭해소위주 탐정장르의 한계

흔히 RPG로 탐정 장르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바로 트릭해결 위주의 방향입니다.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트릭을 알아맞추는 형태로 추리장르를 준비하면 RPG가 퀴즈가 됩니다. 마스터가 추리작가도 아닌데, 참신한 트릭을 준비하는건 어렵습니다. 준비하더라도 퀴즈가 그렇듯 정답을 쉽게 맞추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나뉩니다. 이러한 퀴즈 풀이는 캐릭터의 능력보다는 플레이어의 능력에 달려있고, 결과적으로 PC는 의미를 상실합니다.

그렇다고 트릭을 캐릭터 능력으로 맞추면 보드게임이 되어버립니다. 그럴 경우 이건 인물의 성장과 지속적인 이야기를 거의 할 수 없게되고 PC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균형을 절묘하게 맞추는게 어렵습니다.


트릭을 기반으로하는 탐정 장르로는 장기 세션이나 에피소드식 장기 플레이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대부분 룰에 특화된 1회성 플레이나 단기 세션으로 다룰 수 있으며, 장기 플레이중 추리가 중심이 되는 파트 정도로 다루는 정도가 적합하다고 봅니다.



5. 고전적 RPG 룰에서 탐정 장르

D&D와 같이 도전이 테마인 룰에서 탐정 장르는 수사에 초점을 둡니다. 즉,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도 않고,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 그 범인은 거물이라 단순히 지목했다고 구속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범인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일수록 좋습니다.

강력한 범인을 잡기위해 숨겨진 동기를 파혜치기 위해 돌아다니고, 물증을 잡기위해 탐색하고, 증언을 얻기위해 심문하고, 추격전을 벌이는 등 다양한 도전을 합니다. 당연히 수사를 방해하기위해 존재하는 범인이 무력 방해를 시도할수도 있겟지요. 클라이막스는 범인(악당)과의 한 판 사투 형태입니다. 대화 전투를 흥미롭게 처리할 수 있는 룰이라면 추리쇼에서 범인과의 말싸움이 되거나 법정 공방형태가 되겠지요.


장기 플레이를 즐기기위해선 사건들 뒤에 숨겨진 진정한 흑막의 존재를 활용합니다. 매 사건 해결할 때마다 흑막의 정체를 조금씩 파헤치는 과정이 되겠지요. 추리물보다는 수사물이라고 봐야겠지만요.



6. 이야기 만들기 룰에서 탐정 장르

다같이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데 초점을 두는 룰에서는 탐정 장르라고 부르기가 어렵습니다. 다같이 탐정 장르를 잘 유지하자고 하면 좋겠지만, 함께 스토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드라마가 되어버리는 특성이 너무 강력합니다. 탐정이 등장하고, 멍청한 경찰이 등장하고, 복수하려는 범죄자가 등장하고, 과거의 나쁜 짓을 한 피해예정자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추리구성을 하기엔 너무나도 쉽습니다. 그러나 트릭도 수사도 중요한게 아니라 살인사건을 놓고 그 주위의 인간관계와 변화를 보는거죠. (마치 닥터 하우스 시즌 3이후처럼요.)


다같이 탐정 장르라는 분위기를 잘 유지하면서 한다면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즐기는데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장기적으로 갈 경우 식상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보다는 탐정 장르로 이야기를 만들려는 사람들을 구하는 문제가 더 어렵겠지요.



7. 탐정 장르와 배경

탐정 장르는 이성적 사고에 기반하여 출발했습니다. 트릭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인과관계를 밝히는게 통하는 시대적 배경(근대-현대)이 적절합니다. 종교지도자(제사장, 무당, 성직자)의 말을 대중이 무조건 따르는 시대에서 탐정 장르를 하려면 탐정이 그러한 종교적 영향력을 어느정도 확보해야합니다.


과학, 인권, 법의 발달에 따라 트릭의 방법과 사건 해결 방법이 많이 달라집니다. 주요한 사항으로 촛불/랜턴/전등/손전등, 라디오/TV, 전보/전화/삐삐/휴대폰/GPS, 망원경/거울/사진/캠코더, 사진편집/영상편집기술, 무죄추정원칙/자백의증거력/고문가능여부, 주민등록제도/지문인식/DNA인식 정도가 있습니다. 


판타지와 같이 투명 마법, 축소화 마법, 변신 마법, 저주 마법 등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면 통상적인 과학수사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이런 경우 범인색출을 위해 거짓말 탐지 마법, 투시 마법, 과거 보기 마법, 영혼 소환 마법과 같은 능력을 탐정이 보유해야 균형이 맞습니다. 이러한 능력 여하에 따라 범인 색출과 트릭 풀이의 난이도 설정에 있어 마스터와 플레이어 모두 피곤합니다. 따라서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내놓고 해도 괜찮은 수사물이나 드라마로 방향을 잡는게 좋습니다.



8. 탐정 장르에서 정보와 아이디어

탐정 장르에서 정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정보는 단서이며, 증거니까요. 문제는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룰북은 없습니다. (이걸 너무 체계화하면 보드게임화 되기 때문이죠.) 마스터가 사전에 중요한 정보라고 준비한 정보는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정보라는걸 어필해야합니다. 정보가 많으면 문제가 발생하기보다는 아이디어로 연결하는 경우가 많기에 정보를 주는데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전개하며 의미가 없어진 정보는 신경 쓰지 말고 맥거핀으로 처리하고, 대신 길이 막혔을때 체호프의 총처럼 씁시다.

마스터만 진실을 알고 플레이어를 속이는 정보를 제공해선 안됩니다. 즉, PC는 속이되 플레이어는 속여선 안됩니다. PC가 모르는 정보를 플레이어가 사용하는건 막아야하지만, 그것보다는 플레이어에게 PC가 모르는채로 당하는 놀이를 즐기도록 사전에 대화를 나누어야합니다.

정보가 없다고, 모든 등장인물을 죽여 정보 없이 답(범인)을 찾는건 탐정 장르와는 거리가 멉니다.


탐정 장르에서 가장 답답한 경우는 플레이어가 어떻게 정보를 얻어야하는지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극도로 소극적이며 생각없는 플레이어가 탐정 장르를 할리는 없겠지요. 



9. 추리쇼... 그리고 엔딩

범인의 불행한 과거를 밝히고, 트릭을 전부 파헤쳐 결국 범인으로하여금 자살을 유도하는 K 탐정과 같은 추리쇼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건 관계자 모두 앞에서 공공의 정의가 성립함을 밝히는 행위입니다. 개인적인 복수극이나 범죄가 옳지 않다는걸 도덕적으로 알고 있는 플레이어에게 그러한 추리쇼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추리쇼는 독자와 소설가 사이의 지적 대결에서 해답 공개에 해당하는데, 여러 플레이어가 함께 만들어가는 RPG의 특성은 해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즐기는 부분이므로 그다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1명이 범인을 추리하여 절정부분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일방적으로 쏠리는건 매우 좋지 않은 엔딩에 해당합니다.


흔히 알려진 D&D와 같은 룰에서 인물간 대화 대결을 재미있는 규칙이 전혀 아닙니다. 따라서 이걸 억지로 포인트 삼아 하려다보면 시시해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추리쇼 자체는 시시하더라도, 범인의 최후의 발악에 따른 전투와 같이 모두가 스포트라이트를 나눠받을 수 있는 형태의 마무리가 적합합니다. 전투위주의 규칙이 아니라면 명탐정 코난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같이 추리쇼 이후에 건물붕괴, 눈사태 같은 큰 위기를 만들고 그걸 협동으로 해결하면서 끝 맺는게 마무리로 깔끔합니다.



10. 추천 룰

가장 쉽게 접하는 룰인 D&D나 겁스은 수사물이 적합합니다. 그러나 이 룰로 수사물을 하려면 DM에게 많은 재능이 필요합니다. 흔한 D&D 시나리오에서 인카운터 사이를 단서의 연속으로 이어주면 완벽한 수사물이 됩니다. 그 사이의 연결을 매끄럽게 하는게 어려운거죠.


제가 아는 범위에서 탐정 놀이를 하기 좋은 룰은 '포도원의 개들'입니다. 트릭을 풀며 추리하는 분위기는 아닌 수사물 형태다보니 추리 장르라기엔 조금 아쉽지만, 설전을 흥미롭게 할 수 있는 규칙이라는 점에서 좋습니다. 룰적 배경 역시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상한 일들을 수사하는 장르이기도 하고요.